인현왕후와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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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들은 조선조 제 19대왕 숙종 시절 중전이었던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알고 계실겁니다...
제가 이글을 쓰는 이유는 일반적인 일화와는 조금 다른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냥 심심한데 참고나 하십사...하고..ㅎㅎ
학창시절 역사시간 또는 숱한 TV 사극드라마에서 우린 표독스러운 장희빈만을 보아왔고...(대표적으로탤런트 전인화님)ㅋㅋ
아주 갸냘프고 여리고 맨날 당하기만 하는 인현왕후를 보아 왔습니다...(탤런트 박순애님)ㅋㅋ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인현왕후의 요약입니다...
 
서인과 남인 간의 권력 다툼 과정에서 희빈 장씨(禧嬪張氏)와 함께 희생양이 되어 요절했다. 여흥민씨(與興閔氏)로 아버지는 노론(老論)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이며, 어머니는 서인의 거두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0년(숙종 6)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죽고 5월 경신대출척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한 뒤, 1681년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왕자를 낳지 못해 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는데, 1688년 숙원 장씨(淑媛張氏)가 왕자 윤(昀 : 뒤의 경종)을 낳았다. 1689년 2월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이 윤을 원자로 봉하는 데 반대하면서 숙종과 대립한 결과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장씨는 희빈이 되었다. 민씨는 그해 5월 남인들의 주장으로 폐위되었고, 다음해 10월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94년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의 폐비복위운동을 계기로 갑술환국이 일어나 다시 남인이 밀려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장씨는 희빈으로 내려지고 민씨가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다. 1701년 8월 원인 모를 질병으로 죽었고, 이와 관련되어 희빈 장씨도 무고사(巫蠱事)로 사사(賜死)되었다. 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는 명릉(明陵)이다....
 
자...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사관들이 작성한 역사의 이야기이고...
사실 그 내막에는 북어 판매 독점권에 대한 다툼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왜 우리 역사 선생님들은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그분들 조차도 이런 사실들을 잘 모르고 계셔서 그랬을까요..아니면 시험에 안나오니까...ㅎㅎㅎ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곧 돈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청백리로 유명한 세종대왕때 정승하던 황희도 아주 매관매직에 능한 자였습니다...
뇌물을 밥먹듯 받았고...친인척 관직 등용에 누구보다도 능했답니다...
그 아들놈도 아버지 속을 꽤 많이 어지럽게 했습니다..ㅎㅎ
허나 사간들의 숱한 탄핵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의 능력때문에 끝까지 안고 갔던 것아라 감히 추측을 해 봅니다...
(당시는 건국이 얼마 안된 시기라 나라가 정비가 안되서 황희 같은 두뇌가 꼭 필요했을 듯...)
 
얘기가 딴데로 나가네...ㅎㅎㅎ 아무튼...
 
서인 세력의 총책??인 인현왕후가 숙종의 계비로 들어가자...
북어 판매권을 서인들이 쥐고 흔들어 남인들이 위태하게 됩니다...
(당시 북어는 모두 동해안을 거쳐서 들어왔기 때문에 남인들은 지금의 미아리 근처나 아차산 쪽에서 판매를 하였습니다...)
서인들은 집권세력이라 당당하게 육의전에서 판매를 하였지요...(육의전 궁금하시면 검색^^)
뭐 상설은 아니고 말하자면 좀 복잡하니 자세한건 그렇고 음...정부와 결탁한 공영시장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ㅎㅎ
역사의 정사는 모두 학창시절 배우셔서 잘 아실테고..여긴 주로 비하인드 스토~~리만...^^
암튼...북어...그게 조선 중후기 정치적 근간을 이루는 가장 큰 수입원이었습니다...
싸고 맛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백성이 사다 먹었지요...
(조선시대에는 한양에 내어물전과 외어물전 이렇게 두군데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얼래???
남인들 이대로 찌그러질수는 없는법...
숙종에게 미인계를 쓰게 됩니다...
그게 바로 희빈 장씨였지요...
 
뭐가 될려고 하니까 마침 인현왕후가 출산을 못해서 왕에게 왕따?? 당하고 있을때...
장희빈(원래 이름은 옥정입니다)을 궁녀로 투입...궁둥이를 살랑살랑~~
희빈 장씨가 궁녀시절 숙종에게 아~~잉~~오빠...해가지고서리~~~
아들(경종)을 낳지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면서..^^후궁도 승진하는 재미가 있습죠~~^^
에라디야~~~
남인들 살판 났습니다...
북어를 다시 판매할수 있게 되었지요...
아시다시피 강원도에서 물건(북어) 들어오려면 자신들 관할 거쳐야 하는데...
가격 담합이야 불보듯 뻔한거 아니겠습니까...
 
훗날 인현왕후가 먼저 요절을 합니다...(아마 추측이지만 거의 독살일것으로 추정....)
희빈 장씨가 악랄하게 인현왕후 모함하려고 굿당도 만들고 했지요...
하지만 자식 가진 부모로서 그럴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이란 나라가 군약신강의 나라인지라...
세자책봉이 안되면 목숨이 항상 추풍 낙엽 신세였지요...
서인세력들이 경종이 왕자시절 세자책봉되는것에 엄청난 반대를 하였기 때문에...
장씨의 입장에선 어쩔수 없었을거라 봅니다...미책봉은 곧 죽음일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표독스러운 면도 있었겠지요...
 
아무튼...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두 여인들은...
사실은 북어 판매권(독점권) 때문에 정치적 총대를 매고 일선에 뛰던...
불쌍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제가 이글을 쓰는 이유는 일반적인 일화와는 조금 다른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냥 심심한데 참고나 하십사...하고..ㅎㅎ
학창시절 역사시간 또는 숱한 TV 사극드라마에서 우린 표독스러운 장희빈만을 보아왔고...(대표적으로탤런트 전인화님)ㅋㅋ
아주 갸냘프고 여리고 맨날 당하기만 하는 인현왕후를 보아 왔습니다...(탤런트 박순애님)ㅋㅋ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인현왕후의 요약입니다...
서인과 남인 간의 권력 다툼 과정에서 희빈 장씨(禧嬪張氏)와 함께 희생양이 되어 요절했다. 여흥민씨(與興閔氏)로 아버지는 노론(老論)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이며, 어머니는 서인의 거두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0년(숙종 6)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죽고 5월 경신대출척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한 뒤, 1681년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왕자를 낳지 못해 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는데, 1688년 숙원 장씨(淑媛張氏)가 왕자 윤(昀 : 뒤의 경종)을 낳았다. 1689년 2월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이 윤을 원자로 봉하는 데 반대하면서 숙종과 대립한 결과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장씨는 희빈이 되었다. 민씨는 그해 5월 남인들의 주장으로 폐위되었고, 다음해 10월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94년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의 폐비복위운동을 계기로 갑술환국이 일어나 다시 남인이 밀려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장씨는 희빈으로 내려지고 민씨가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다. 1701년 8월 원인 모를 질병으로 죽었고, 이와 관련되어 희빈 장씨도 무고사(巫蠱事)로 사사(賜死)되었다. 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는 명릉(明陵)이다....
자...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사관들이 작성한 역사의 이야기이고...
사실 그 내막에는 북어 판매 독점권에 대한 다툼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왜 우리 역사 선생님들은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그분들 조차도 이런 사실들을 잘 모르고 계셔서 그랬을까요..아니면 시험에 안나오니까...ㅎㅎㅎ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곧 돈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청백리로 유명한 세종대왕때 정승하던 황희도 아주 매관매직에 능한 자였습니다...
뇌물을 밥먹듯 받았고...친인척 관직 등용에 누구보다도 능했답니다...
그 아들놈도 아버지 속을 꽤 많이 어지럽게 했습니다..ㅎㅎ
허나 사간들의 숱한 탄핵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의 능력때문에 끝까지 안고 갔던 것아라 감히 추측을 해 봅니다...
(당시는 건국이 얼마 안된 시기라 나라가 정비가 안되서 황희 같은 두뇌가 꼭 필요했을 듯...)
얘기가 딴데로 나가네...ㅎㅎㅎ 아무튼...
서인 세력의 총책??인 인현왕후가 숙종의 계비로 들어가자...
북어 판매권을 서인들이 쥐고 흔들어 남인들이 위태하게 됩니다...
(당시 북어는 모두 동해안을 거쳐서 들어왔기 때문에 남인들은 지금의 미아리 근처나 아차산 쪽에서 판매를 하였습니다...)
서인들은 집권세력이라 당당하게 육의전에서 판매를 하였지요...(육의전 궁금하시면 검색^^)
뭐 상설은 아니고 말하자면 좀 복잡하니 자세한건 그렇고 음...정부와 결탁한 공영시장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ㅎㅎ
역사의 정사는 모두 학창시절 배우셔서 잘 아실테고..여긴 주로 비하인드 스토~~리만...^^
암튼...북어...그게 조선 중후기 정치적 근간을 이루는 가장 큰 수입원이었습니다...
싸고 맛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백성이 사다 먹었지요...
(조선시대에는 한양에 내어물전과 외어물전 이렇게 두군데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얼래???
남인들 이대로 찌그러질수는 없는법...
숙종에게 미인계를 쓰게 됩니다...
그게 바로 희빈 장씨였지요...
뭐가 될려고 하니까 마침 인현왕후가 출산을 못해서 왕에게 왕따?? 당하고 있을때...
장희빈(원래 이름은 옥정입니다)을 궁녀로 투입...궁둥이를 살랑살랑~~
희빈 장씨가 궁녀시절 숙종에게 아~~잉~~오빠...해가지고서리~~~
아들(경종)을 낳지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면서..^^후궁도 승진하는 재미가 있습죠~~^^
에라디야~~~
남인들 살판 났습니다...
북어를 다시 판매할수 있게 되었지요...
아시다시피 강원도에서 물건(북어) 들어오려면 자신들 관할 거쳐야 하는데...
가격 담합이야 불보듯 뻔한거 아니겠습니까...
훗날 인현왕후가 먼저 요절을 합니다...(아마 추측이지만 거의 독살일것으로 추정....)
희빈 장씨가 악랄하게 인현왕후 모함하려고 굿당도 만들고 했지요...
하지만 자식 가진 부모로서 그럴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이란 나라가 군약신강의 나라인지라...
세자책봉이 안되면 목숨이 항상 추풍 낙엽 신세였지요...
서인세력들이 경종이 왕자시절 세자책봉되는것에 엄청난 반대를 하였기 때문에...
장씨의 입장에선 어쩔수 없었을거라 봅니다...미책봉은 곧 죽음일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표독스러운 면도 있었겠지요...
아무튼...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두 여인들은...
사실은 북어 판매권(독점권) 때문에 정치적 총대를 매고 일선에 뛰던...
불쌍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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